사람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좋은 토양을 가꾸기 위하여

글·사진 | 트래비 강화송 기자       사진제공 | 제주 자작나무숲, 협동조합 모두락
미로마을 골목 전경

ⓒ 미로마을 골목 전경

좋은 토양의 조건

농사는 땅심이다. 땅심이란 농작물을 길러낼 수 있는 토양의 건강함을 뜻한다. 똑똑한 농부의 농사는 땅심을 기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좋은 토양이란 무엇일까. 비단 ‘흙’에만 한정되는 것일까. 깨끗한 공기, 영양분, 가끔 시원하게 내리는 소나기, 따가운 햇빛, 양질의 비료, 농부의 관심, 그곳에서 살아가는 곤충 그리고 지렁이 같은 것들. 이처럼 땅심은 땅을 이루는 수만 가지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만든다. 결국 좋은 토양은 다양한 주체의 ‘상호의존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사람도 그렇다. 나의 할아버지는 무려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쌀농사를 지어왔다. 가을이면 황금색 벼가 지천을 덮었다. 근사한 농사꾼이었던 할아버지는 항상 내게 이렇게 말했다. “밥을 논하기 전에, 항상 밥그릇부터 잘 돌봐야 한다. 그게 농사의 순서다.” 곡식의 그릇은 토양이고, 사람의 그릇은 마을이다.

안타깝게도 최근 그릇이, 그러니까 마을이,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농어촌 마을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당장 눈으로 체감할 수 있는 문제는 마을 구성원의 고령화겠다. 새로운 전입 주민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고령화는 마을 붕괴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마을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사실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마을’은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살기만 하는 장소가 아니다.

마을은 주민들이 서로 문화를 공유하는 터전이다. 그러니까 시작은 마당에 예쁜 꽃을 심어 이웃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 골목에 돌아다니는 쓰레기를 주워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 맛있는 음식을 옆집과 나누며 수다를 떠는 것. 이처럼 ‘생활’의 단계를 지나 주민들의 힘으로 자생적인 ‘마을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만든 문화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쟁취하는 쪽으로 발전해야 한다. 마을이 점점 시들어간다는 것은 마을의 문화 자생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을의 자생적인 문화를 생성하고 유지하는 것, 무엇보다 마을의 문화가 지속성을 가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 해답을 제주도에서 찾았다.

미로마을 신촌 바다

ⓒ 미로마을 신촌 바다

‘괸당’ 문화가 선순환하는 문화장터
제주시 협동조합 모두락, 미로마을 신신촌장

제주 공항에서 동쪽으로 10km, 제주시 조천읍에는 ‘신촌(新村)’이라는 마을이 자리한다. 제주 바다를 아담하게 두르고 있는 작은 마을인데, 고즈넉한 시골 분위기 덕분에 최근 여행객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마을 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볼거리도 다양하다. 조선 후기 지방의 공무를 처리하던 기관인 ‘신촌향사’, 고려 후기 삼별초 군사를 막기 위해 축조한 석성(石城)인 ‘환해장성’, 닭이 흙을 파헤치고 그 안에 들어앉은 모습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은 ‘닭모루’ 등 굵직한 관광지가 자리한다. 닭모루 입구에서 신촌 포구까지의 구간은 나무 데크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제주도 최고의 일몰 명소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 초입에 위치한 남생이못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이 연못에서 소원을 빌면 남자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신촌마을 초입
남생이못
남생이못
닭모루
신촌향사

ⓒ 신촌마을 초입 / 남생이못 / 닭모루 / 신촌향사

신촌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미로마을’이다. 제주의 마을 골목은 기본적으로 직각 형태로 구성된 곳이 대부분인데, 신촌의 마을 골목은 둥근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려 100여 년 전부터 내려온 둥근 골목들은 마치 한 번 들어서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미로 같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신촌마을은 다양한 볼거리를 앞세워 ‘신신촌장’이라는 문화 행사를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신신촌장은 마을에 거주하는 지역 농부, 예술가, 상인들이 참여하는 마을 문화 장터다. 독특한 점이라면 엄연한 문화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전문기획자나 예술가가 아닌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기획하고 운영한다는 점이다. 신신촌장의 시작은 이랬다.

미로마을 신촌 마을 내부
미로마을 신촌 마을 내부
신신촌장 행사 사진
신신촌장 행사 사진

ⓒ 미로마을 신촌 마을 내부 / 신신촌장 행사 사진

2006년 마을 도서관을 중심으로 농어촌 지역의 열악한 교육, 문화,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자 이에 뜻을 같이하는 주민들이 모여 ‘협동조합 모두락’을 설립했다. 이후 마을책축제, 작은음악회, 영화 상영 등을 자체적으로 기획하고 진행하며 경험을 쌓아갔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빚어낸 마을문화장터 신신촌장은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진행하는 ‘지역문화 콘텐츠 특성화 사업’에 선정되며 날개를 달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장터의 탄생이 주민들 간에 소통의 부재와 이주민들의 유입에 의한 문화차에서 오는 오해들로 인한 갈등이 깊어가던 중 ‘한 달에 한 번 이라도 서로 같이 어울려 놀자’라는 취지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마을 주민 간 소통이 장터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전문가의 도움 없이 오로지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 장터를 꾸려갔다. 마을은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평생을 조용한 마을에서 생활한 마을 어른분들에게는 신신촌장이라는 문화 장터가 굉장히 생소한 행사였을 뿐더러, 소음, 주차 등의 여러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장터를 꾸준히 꾸릴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제주의 ‘괸당’ 문화였다.

신신촌장 행사 사진
신신촌장 행사 사진
신신촌장 행사 사진

ⓒ 신신촌장 행사 사진

제주에는 ‘괸당이 정당보다 세다’라는 말이 있다. 괸당은 친인척을 뜻하는 제주의 사투리다. 옆집 아저씨도 괸당, 동네 형도 괸당, 어지간한 마을 주민이라면 전부 괸당이다. 이웃사촌이 곧 가족이다. 장터가 생활에 불편을 끼치더라도, 당장 내일 싸워도, 설사 이미 싸웠다고 하더라도 이웃과의 관계는 마을을 떠날 때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마을 어르신들의 일방적인 이해만을 바란 것은 아니다.

장터를 기획하는 마을의 젊은 층들이 마을 어른들을 직접 찾아가 마을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물었고, 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마을의 문화를 개발시켰다. 마을 노인정 분들이 직접 만든 지름떡을 시장에 선보이기도 했다. 지름떡은 제주의 전통 떡인데, 하얀 찹쌀을 잘 반죽해 기름에 노릇하게 부친 떡이다. 신신촌장에 참여하는 지역 작가들은 마을 어른들의 옛 이야기를 바탕으로 팬 드로잉을 선보이기도 했고, 어느 때는 음악회를 통해 마을 구전 이야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마을 내 어른들로 구성된 댄스 생활동호회의 공연도 종종 선보였다. 처음 섭외 당시에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공연을 거절했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마을 어른들 스스로 공연을 즐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오히려 먼저 공연을 제안하기도 한단다. 결국 미로마을의 신신촌장이 오늘과 같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무엇보다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마을 주민들끼리’ 장터를 직접 기획하고 참여했기 때문이다. 미로처럼 서로 관계가 얽혀 단단해져 버린 상태. 지역 주민 모두가, 세대와 상관없이 문화의 주체가 되는 것, 그리고 그 문화를 마을의 모든 사람과 공유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함께 즐겁고 행복한 마을살이의 시작점이며, 마을이라는 그릇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노력이다.

신신촌장 행사 사진
미로마을 신촌 마을 내부
미로마을 신촌 마을 내부

ⓒ 신신촌장 행사 사진 / 미로마을 신촌 마을 내부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아코디언 연주

ⓒ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아코디언 연주

제주의 숲, 음악, 그리고 사람
서귀포시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협동조합 모두락’이 지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해 지속성을 가졌다면, ‘자작나무숲’의 ‘힐링 콘서트’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지속성에 접근했다. 자작나무는 주로 추운 지방에서 자생한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도 기후가 따뜻한 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자작나무의 자생지로 적합하지 않다. 서로 성질이 상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도의 토양에 기어코 자작나무숲이 뿌리를 내렸다.

‘자작나무숲’은 제주민들로 구성된 클래식 음악 단체다. 제주도라는 지역과 자작나무숲이라는 팀명이 조금은 이질적인 관계처럼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자작나무숲’이라는 팀명은 문화적으로 차가운 제주도에 단단한 뿌리를 내려 포근한 숲을 만들겠다는 팀원의 의지를 담았다. 자작나무숲은 2002년부터 제주 지역민들을 위한 작은 음악회를 열며 문화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숲’과 ‘음악’을 결합해 지역민들에게 문화적인 ‘힐링’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자작나무숲은 2016년 문을 연 제주도 ‘치유의숲’에서 본격적인 음악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자작나무숲’이 지역문화 콘텐츠 특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은 지 올해로 5년 차에 접어들었으니, 치유의숲과 그 성장을 같이해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치유의숲은 제주 서귀포시 호근동에 위치한다. 오래전 화전민들이 살았던 숲의 생태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숲이다. 피톤치드를 제일 많이 내뿜는다는 편백나무와 삼나무 군락이 가득해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 총 길이는 15km, 1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자작나무숲의 ‘치유의숲 힐링 콘서트’는 많은 걱정을 안고 시작했다. 가장 큰 걱정은 역시 숲에서 음악을 감상할 관객의 부재였다. 나름대로 지역 신문이나 SNS 활동을 통해 작은 홍보를 이어갔고, 제주 호근동 부녀회에서 직접 만든 차롱 도시락을 음악회 도중 제공하기로 협력하며 지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었다. 차롱 도시락은 옛날 제주 사람들이 소를 몰러 나가거나,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 들고 다녔던 도시락이다. 관객 모집에 대한 의구심은 힐링 콘서트의 첫 회에 깨끗이 씻겨 나갔다.

자연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힐링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한 명의 입소문은 두 명의 관객이 되었고, 두 명의 입소문은 수십 명의 관객들을 숲으로 불러 모았다. 음악과 자연의 힘은 이토록 대단했다. 주변을 산책 삼아 걷던 지역 주민부터, 저 멀리 서울에서 건너온 암 환자까지. 음악에서, 그리고 자연에게 위로를 받았다.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힐링 콘서트는 야외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여러 변수도 고려해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였다. 섬의 날씨는 한 치 앞을 예상하기 어렵다. 한 번은 공연 중 세찬 비가 쏟아졌다. 숲을 가득 메운 빗소리는 기어코 음악 소리를 전부 덮어버렸다. 주변은 순식간에 안개가 차올랐고, 자작나무숲을 이끄는 우상임 음악감독은 잠시 음악회를 멈춰야 하나 고민도 했었단다.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 비를 피하려 하지 않았고, 음악회가 끝나고는 오히려 비가 와서 더욱 감동적이라는 평을 했다. 이때 자작나무숲은 ‘힐링’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숲이 사람에게 주는 힐링만큼, 사람도 숲에게 힐링으로 갚아야 한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시점이다.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 자작나무숲 힐링 콘서트

이후 자작나무숲은 서귀포 쓰레기위생매립장 같이 사람의 관심이 필요한 자연에게 먼저 다가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힐링의 요소를 자연으로부터 찾아왔다면, 주민이, 마을이, 더 나아가 지역 사회와 문화가 자연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어떤 것을 행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작나무숲은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소통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힐링 콘서트는 무궁무진한 형태로 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된 것이다. 자작나무숲은 ‘문화가 있는 날 지역문화 콘텐츠 특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은 지 올해로 5년 차에 접어들며 졸업하게 되었지만, 서귀포시와의 꾸준한 협업을 통해 제주에 머무는 사람과 자연에게 음악이란 매개체를 통해 힐링을 선물하고 있다.

쓰레기위생매립장 공연
쓰레기위생매립장 공연
쓰레기위생매립장 공연
쓰레기위생매립장 공연
산지등대공연

ⓒ 쓰레기위생매립장 공연 / 산지등대공연

결국 농사는 땅심이다.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요소가 제자리에서 각기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낼 때, 비로소 좋은 토양을 일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좋은 토양을 일구는 것과 좋은 토양을 유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꾸준히 ‘소통’하는 것. 그리고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지역의 문화를 발견하고 만들어 가는 것. ‘문화가 있는 날’을 넘어 ‘문화가 있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 다채로운 제주 땅에서 배운 지역의 토양을 일구는 힘은 바로 그것이었다. 협동조합 모두락이 ‘신신촌장 문화장터’를 통해 행복한 마을살이를 유지하듯, 자작나무숲이 음악이란 매개체로 제주숲의 가치를 지역민들과 소통하듯···.

강화송
여행매거진 <트래비> 기자
매일같이 어느 지역을 떠돌며 기록하는 기자 겸 사진가. 사람을 만나 글로 옮기고, 문화를 만지며 사진을 남긴다. 그렇게 모은 기록들이 각 지역의 좋은 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남기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