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가 문화의 큰 흐름이다

글 | 구모룡 문학평론가

지역문화를 어떻게 말할까. 먼저 방법이 문제다.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을 따라서 지방과 지역을 같은 위치에 두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낡고 고지식한 관점이라면 지역문화를 진흥하는 일이 마치 시혜처럼 보이게 된다. 소위 ‘지방’에 살면서 이와 같은 불편한 심리를 드러내는 이가 적지 않다. 날로 열악해지는 지역 여건에 심사가 뒤틀리기도 한다. 이분법에 기대어 비난의 수사학을 반복한다. 이러한 태도로 지역문화를 활성화하긴 어렵다. 무엇보다 자기가 사는 장소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이 중요하다. ‘구체적’(cocrete)이라는 말은 함께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수도권 일극체제와 지방소멸 담론

최근 들어 빈번하게 회자하는 수도권 일극(一極) 체제와 지방소멸 담론도 이분법의 틀을 강화하는 국면이다. 이는 중심에 종속된 주변이라는 오랜 담론의 새로운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효율을 좇아서 한국 사회가 일극 체제의 인력에 끌리고 있다는 진단은 틀림이 없다. 현대적 삶을 형성하는 세 가지 공간인 학교와 공장과 집을 살펴보면 이는 쉽게 보인다. 소위 ‘SKY’, ‘인 서울’의 교육 현실이 그렇다

부산 일대 각자 다양한 형태의 주거지들이 보인다

내가 사는 부산만 하더라도 전국 2위의 도시인데 고등학생들의 마음은 이미 서울을 향해 있다. “벛꽃 피는 순서로 망한다”라는 지역대학 소멸론도 만연하여 불안을 조장한다. 산업구조 재편 이후에 각 지역의 기간산업이 기우는 경우가 많다. 이를 대체해야 하는 첨단산업이나 고부가 가치를 지닌 지식산업은 수도권으로 몰린다. 대규모 국제공항이 물류를 돕고 창조계급이 많은 중심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도 이러한 흐름을 따라간다. 집합적인 주거공간인 아파트 단지가 날로 늘고 집의 자산가치가 큰 격차를 만든다. 이러다 보니 ‘일극체제’라는 말이 이제 빈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에 상응한 지방소멸도 진행형이다. 오지나 산간벽지가 아닌 마을도 없어지고 있다. 학교가 문을 닫고 철도가 끊어진다. 체제를 변혁하지 않으면 대안이 없다는 소리도 나온다. 그저 분권을 욀 일이 아니라 연방제에 버금가는 개헌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집값 광풍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의 중심주의는 여지없이 제 진면(眞面)을 드러내었다. 또한 대선 국면을 맞아서 중앙정치가 일거에 여러 지향과 가치를 앗아간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재생 담론이다. 개발에서 재생으로 전환을 선언하지도 벌써 십수년이 지났는데 다시 개발 혹은 성장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부동산 파동과 정치적 상황 변동이 재생의 가치를 격하한다. 그러니까 재생은 자기 사는 마을로 돌아가서 잘 가꾸며 살아보자는 미시정치의 이념이다. 개발과 성장이라는 거시정치의 폭격을 맞으면서 어느새 재생의 패러다임이 휘청대거나 요절나고 있다.

재생은 지역문화를 실천하는 주요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고장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삶의 전환을 이룬다는 목표가 있다. 이러한 목표가 흔들리면서 묵묵히 자기 사는 지역에 애착을 보내면서 성실하게 수행해온 이들의 열패감이 큰 현실이다. 거기다 끊임없이 개입하는 중앙정치의 정파적 간섭은 지속 가능한 재생의 문화실천을 더디게 한다. 이처럼 중심주의는 미시적 실천을 휘발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로막는다.

일극체제론은 종속론의 연장으로 지역을 내국 식민지로 확대해석한다. 지역에 착취할 무엇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보면 과잉이다. 하지만 지역의 희생을 딛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이 던지는 파장이 적지 않다. 주장이 강렬한 만큼 정치적 효과가 강하다. 인구학적으로 수도권이 과반을 넘겼고, 그 안에 사는 지식분자 혹은 지도층에 지역인지능력 혹은 감수성이 지극히 부족한 이가 많으니 주장하는 바의 실질을 얻어낼 수 있을까 난망하다. 이러한 체제를 혁파하려는 여러 방안이 모색되고 실천의 진지를 구축해야겠다.

체제의 관점에서 스케일의 관점으로

부산 주요 도심 일대

돌이켜 보면 그동안 중심주의적 일극체제론을 극복하려는 시도와 방법이 없었던 바 아니다. 체제(system)가 아니라 스케일로 보려는 방법의 도입이다. 물론 이 둘은 서로 연관성을 지닌다. 체제라는 것이 프랙털과 같아서 무한 반복하는 양상이다. 일국 차원에서의 중심과 주변은 각 지역의 거점 도시, 나아가 더 작은 단위로 내려가도 거듭 반복한다. 지역을 스케일로 보려는 노력은 국가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 보자는 시도이다. 가령 부산이나 인천이 해역(海域)을 통하여 자기를 인식하는 방법이 한 예가 된다. 인천은 서해의 섬들을 시야에 넣고 황해 시대를 주창하였다. 한강 유역과 바다를 잇는 평화공동벨트의 발명도 종요롭다. 부산도 이에 질세라 후쿠오카와 초광역 경제권을 실행한 바 있다. 전자는 텐진이나 요코하마처럼 수도의 관문이 가지는 위상을 자기화의 동력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다. 후자는 제2 도시의 위상을 내국 차원에 머물지 않고 지역적(regional)인 위치로 높여가려는 실천이다.

하지만 이 모두 흔들리고 있다. 달라진 중국 경제 상황이 그렇고, 동아시아 국가 간의 관계 변동이 그렇다. 여기에다 2020년부터 진행된 팬데믹이 교류의 흐름을 차단하면서 국가주의적 중심으로 지역의 역량을 회수하는 형편이다. 다시 ‘황해시대’와 ‘동남해시대’가 요원하다.

그런데 스케일의 관점에서 지역문화는 로컬문화이다. 동어반복일 수 있으나 지적하고 넘어야 할 개념이 로컬이다. 로컬을 지방으로 동일시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로컬은 자신이 사는 장소이다. 가장 기초는 몸이다. 공기를 호흡하고 걷고 먹고 마시는 동네를 말한다. 자기 곁에 가족이 있고 마을 사람들이 있다. 이게 로컬 개념이다. 가령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강남은 로컬인가, 아닌가? 당연하게 강남도 로컬이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이 있으니 응당 로컬문화가 있다. 서로 다른 아비투스가 만드는 차이, 갈등, 대립은 로컬과 로컬이 만날 때 생겨나는 계급의 문제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로컬이 균질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지역문화가 가장 먼저 착목해야 할 현실이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로컬이다. 이는 직립 보행하는 인간의 본성과 일치한다. 아름다운 장소를 만드는 방법의 첫 출발이, 나무 하나 더 심고 화분 하나 더 놓는 일이듯이, 누구나 사는 터전에 대한 바른 인식과 실천이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자주 지역문화를 생활문화와 연관시키는 까닭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미시적 실천은 매우 섬세한 생명문화운동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점에서 지역을 제대로 알고 그 내재적 가치를 찾아서 바르게 실현하자는 움직임이 중요하다. 지역학(예를 들어 인천학, 부산학 등)이나 마을과 가족으로 내려간 아카이빙 사업이 이를 증명한다. 나무 밑에서 드러누워 나무를 보면 나무 앞에 서 있을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듯이 어떠한 시각으로 로컬을 바라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종요롭다.

로컬문화의 ‘특이성’에 주목하자

로컬문화에 대한 실질적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는 추상화가 있다. 대도시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크다. 강남 사람이 자기가 사는 터전인 로컬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으리라 추측하기 힘들지 않다. 특권화된 시각을 지녔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하지만, 서울 중심주의나 일극체제론에 대한 견결한 비판이 요긴하지만, 이와 같은 담론에 휩쓸려 재생 패러다임이나 로컬의 생활문화 살리고 가꾸기가 둥둥 떠내려가게 내버려 두진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미시적 분석과 미시적 실천이라는 두 방향이다. 가령 문화도시 프로젝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그 지역의 ‘특이성’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사는 부산을 이해하려 들면 매우 다양한 국면이 중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낙동강 유역과 금정산 기슭, 해양을 접한 연안이 모두 다른 형국이다. 각기 다른 로컬마다 고유하고 개별적인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 점을 제대로 아는 일이 먼저이다. 그러니 더 세분화된 지역학적 분석과 아카이빙이 전제되어야 한다. 경쟁하듯이 모방하고 베끼는 기획은 주체를 상실하게 만든다.

미시적 분석 다음으로 미시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장소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안 뒤에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미래가 지속가능한 형태를 보장될 수 있게 해야 한다. 팬데믹을 관통하면서 확실하게 이와 같은 지역화의 가치가 증대하였다. 하지만 성장과 속도의 폭탄을 던지는 중심의 회오리바람에 지역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미래가 사라지고 있다는 어두운 기운 앞에서 다시 자기의 진정한 생성의 거처를 재인식하는 노력이 큰 흐름이 되어야 할 때이다. 바로 지역문화가 이러한 자리에 있다.

구모룡
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반연간지 <문학/사상> 편집인.
저서 <해양풍경>,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가치>, <폐허의 푸른 빛-비평의 원근법> 등 다수.
팔봉비평문학상(31회) 수상